불운한 왕자, 소현세자
'인조실록'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한 의문에서 시작한 영화 '올빼미'를 보고 소현세자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소현세자는 조선후기 제16대 왕인 인조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이왕(李炡)이고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의 형입니다.
1637년 병자호란 삼전도 굴욕의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세자가 8년 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왕실의 공식 기록인 실록의 기록에서 조차 독살의 의심이 갈 정도였고, 세자의 사후에 인조가 취한 조처들을 보면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들은 무척이나 많아 보입니다.
소현세자, 청나라에서의 8년
소현세자는 8년간 청나라에서 볼모로 생활하면서 청나라의 놀라운 발전에 큰 자극을 받게됩니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신생대국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던 청나라의 군사적인 측면과 함께 문화대국으로 성장해가는 잠재력을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아담샬'과 같은 선교사를 통하여 천주교 뿐만 아니라 화포, 망원경과 같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아담샬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도 이러한 서구의 과학문명이 필요함을 절감하였으며, 서구 문명 수용에 개방적인 청나라 조정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합니다. 소현세자는 새로운 서양 문명과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조선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화포와 천리경 등을 가져온 것도 이러한 의식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였습니다.
소현세자의 귀국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는 마침내 소현세자의 조선 귀국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1645년 소현세자가 8년 만의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왔을 때 그의 귀국을 달갑게 여기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과 청나라의 세자에 대한 신뢰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장성한 소현세자는 이제 인조의 아들이 아니라 차기 국왕 후보였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이 추진한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념이 퇴색될 것이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조정의 관료들 대부분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 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고,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조는 자신을 물러가게 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청의 움직임을 경계하였습니다. 또한 반정으로 오른 왕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인조는 본능적으로 왕위 유지에 집착하면서 아들까지도 경쟁자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
실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이 꽤 많습니다. 특히 왕이나 세자의 죽음은 권력 다툼에 의한 발생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있고, 영조의 독살설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는 주장은 밝혀진 정설은 아닙니다. 다만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념적 갈등이 매우 심각했고, 왕위 계승의 경쟁자라는 점 때문에 상당한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조선 왕실에서 언급되는 독살설 중 가장 그 가능성이 높게도 보입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하여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分辨)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23년(1645년) 6월 27일
그러나 최근 소현세자의 심양 생활을 기록한 『심양일기』에 소현세자가 병을 앓은 내용이 나타나고, 심양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동안의 건강 문제 등이 겹쳐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높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심양일기』에 의하면 소현세자는 1638년부터 질병이 잦아져 감기, 소화불량, 안질, 마비증세, 불안 습종(濕腫) 등의 질환으로 고생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독살이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인조측이 소현세자의 죽음을 호재로 활용한 측면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쳐두고 서둘러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이제 최대의 정적이 된 며느리 강빈을 사사(賜死)시킨 것이 이러한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못다 핀 소현세자의 꿈
소현세자가 심양의 인질 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용을 통한 부강한 조선 만들기의 꿈. 그러나 그 북학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만약을 이야기 합니다. 만약 소현세자가 조선의 제17대 국앙이 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또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참고 : 한국역사연구회 www.koreanhistory.org / 신병주 교수
GOO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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