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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아닌 잡학사전

강감찬 장군, 역사를 빛낸 명장

by goof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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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빛낸 명장, 강감찬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명장은 누구일까요?. 아마 국민 대부분은 조선의 '이순신'장군을 뽑을 겁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별로 나라를 구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장들이 꽤 있는데요.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백제의 계백장군,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기억됩니다. 고려로 넘어오면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 장군과, 고려말 최영 장군이 있습니다.

오늘 포스팅은 고구려의 명장 '강감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고려 거란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KBS 대하사극에 최수종 배우가 강감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문관 출신의 명장, 강감찬

강감찬은 고려 제8대 왕 현종의 신임을 얻고 나라의 운명이 걸린 전투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大捷)'을 꼽는다면,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그리고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을 꼽는다고 하는데요. 그중 고려 시대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을 이끈 장군 강감찬은 948년(고려 정종 3)에 태어났습니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입니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강궁진(姜弓珍)이며,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고려사>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실 때문에 강감찬을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강감찬은 원래 문관이었습니다.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오늘날 국무총리 격)에 오르기도 합니다. 36세의 늦은 나이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강감찬은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에 대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사람들이 평소에는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과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소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옷이 닳고 해질 때까지 입었다고 합니다.

 

서울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

 

서울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 측면

 

 

거란의 침입

거란은 시라무렌강 유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았던 유목 민족입니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대륙의 북방 초원 지역에 살고 있었으나, 10세기 초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통치자가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에 거란국을 세웠습니다. 중국 대륙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던 거란에게 고려의 북진 정책은 걸림돌이었습니다. 게다가 고려는 거란과의 외교를 단절한 채 송나라와 친교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게 하기 위해 고려를 침입
  • 고려가 첫 전투에서 패배했고 서희는 계속 싸우자고 주장
  • 고려가 거란의 추가 공격을 막아내자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고려를 위협
  • 이때 거란의 침입 의도를 파악한 서희가 소손녕을 찾아가 담판을 지음
  •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를 약속하며 압록강 강동 6주 차지

 

거란의 2차 침입

  • 고려가 송나라와 관계를 끊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침입
  •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을 빼앗김
  • 돌아가는 거란을 공격해 승리

 

거란의 3차 침입

  • 고려의 왕이 거란의 황제를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류로 침입
  • 미리 침입을 예상하고 준비한 강감찬의 활약으로 귀주 등에서 크게 승리

 

흥화진전투와 귀주대첩

고려의 친조 요구 거절과 강동 6주 반환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거란은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3차 침입을 단행하게 됩니다. 강감찬 장군은 기병 12,000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에 매복, 동쪽의 큰 내를 소가죽과 밧줄을 엮어 막아둔 채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을 내어 거란군을 크게 이깁니다.

거란군은 흥화진 전투의 패퇴에도 물러나지 않고 개경으로 남진합니다. 그러나 개경의 굳건한 방비와 연이은 패전으로 회군할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쳐 돌아가는 거란군을 상대로 강감찬을 비롯한 고려의 명장들은 승리를 거두고 귀주에서 크게 이겨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합니다. 이후 거란은 고려의 친조와 강동 6주 만환요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감찬의 인품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대파하고 돌아오자, 현종이 친히 마중을 나가 얼싸안고 환영을 했습니다. 또한 왕궁으로 초청해서 중신들과 더불어 주연상을 성대하게 베풀었습니다. 한창 주흥이 무르익을 무렵, 강감찬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소변을 보고 오겠다며 현종의 허락을 얻어 자리를 떴습니다. 나가면서 강감찬은 살며시 내시를 보고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시중을 들던 내시가 그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강감찬은 내시를 자기 곁으로 불러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조금 전에 밥을 먹으려고 밥그릇을 열었더니 밥은 있지 않고 빈 그릇뿐이더군.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내가 짐작하건대 경황 중에 자네들이 실수를 한 모양인데 이걸 어찌하면 좋은가?" 순간 내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빈이 강감찬 장군이고 보면 그 죄를 도저히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내시는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부들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이때 강감찬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미가 급한 임금께서 이 일을 아시면 모두들 무사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가? 내가 소변보는 구실을 붙여 일부러 자리를 뜰 것이니, 내가 자리에 앉거든 곁으로 와서 '진지가 식은 듯하오니 다른 것으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른 것을 갖다 놓는 것이 어떤가?" 내시는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있은 후, 강감찬은 이 일에 대해 끝가지 함구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내시는 그 사실을 동료에게 실토했으며, 이 이야기가 다시 현종의 귀에까지 들어가, 훗날 현종은 강감찬 장군의 인간됨을 크게 치하해 모든 사람의 귀감으로 삼았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강감찬 전시관

강감찬 전시관 (서울 관악구 낙성대로 77)

강감찬의 본적은 옛 금천현(衿川縣), 현재의 관악구 낙성대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관악구 낙성대로 77에 강감찬 전시관이 있습니다. 주말에 아이들과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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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강찬 전시관 이용안내

  • 운영시간 : 화~일 10:00~18:00 (동절기 1~2월 10:00~17:00)
  • 휴 관 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 관 람 료 : 무료
  • 주소 : 서울시 관악구 낙성대로 77 낙성대공원내
  • 문의 : 전화 879-5618,9 / FAX 879-7820

 

GOO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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